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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유적지를 핫플레이스로 만드는 방법 – 타이쿤

유적지가 오래되고 희소하며 보존이 잘 되어 있을수록 역사적 가치가 높아집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공간이 되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역사적 의미도 지키면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 보존 외에 또다른 노력이 필요합니다. 옛 경찰서, 관공서, 교도소로 이루어진 홍콩의 타이쿤(Tai Kwun)에는 연간 340만 명이 방문합니다. 무엇이 150년 된 유적지를 이토록 핫하게 만들었을까요?

 

Quick View

• 들어가며
• #1. 구조에 손대지 않되 재해석한다
• #2. 다시 올 이유를 만든다
• #3. 역사 콘텐츠를 현재 버전으로 업데이트한다
• 살아있는 박물관이 되기 위한 조건

 

본 콘텐츠는 읽는 데 총 10분 정도 소요됩니다.

 


 

홍콩은 도박의 나라입니다. 성인인구 열 명 중 여덟 명이 도박을 합니다. 청소년 열 명 중 네 명이 도박을 하며, 그 중 세 명은 10살 이전에 도박을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보니 경마, 로또, 스포츠 토토 등 도박 사업을 독점 운영하고 있는 홍콩 자키 클럽(Hong Kong Jockey Club)의 벌이가 쏠쏠합니다. 홍콩 세수의 7%를 웃돌아 수년째 최대 세원 지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과연 홍콩 정부의 ATM이라고 불릴 만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국가가 나서서 사행 사업을 장려해도 되는 것일까요? 홍콩 시민들의 비판은 없을까요?

 

홍콩 자키 클럽의 사명을 보면 도박에 대한 홍콩 사회의 관대함이 이해가 됩니다. ‘말을 통해 정부의 세수 확보에 기여하고, 홍콩 시민을 위해 최고의 자선과 기부,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입니다. 실제로 세금과 최소한의 운영비를 제외한 이익 잉여금 전액을 홍콩 지역 사회에 기부합니다. 이를 통해 홍콩 인구의 75%가 수혜를 받으며, 규모 면에서 자선 기부단체 세계 랭킹 6위에 오를 정도입니다. 기부액에서 예상할 수 있듯 도박 사업 수완도 뛰어납니다. 도박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얼마간 인정하고 불법 도박으로 빠질 수 있는 수요를 양지에서 관리하자는 것이 이들의 방향성입니다. 그래서 핵심 사업인 경마의 경우 고객이 경마장에 오지 않고도 어플로 원격 베팅을 할 수 있게 하고, 베팅 금액에 제한을 두지 않는 등 문턱을 확 낮췄습니다. 또한 총 베팅 금액 중 고객이 가져가는 금액의 비중인 환수율을 높이고, 베팅 손실액에 대한 리베이트를 하는 등 보통 불법 도박에서 쓰는 유인책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합니다. 그러면서도 매년 3억 6천 만 홍콩달러(약 567억 원)를 도박 중독 예방에 써서 도박이 건전한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로 자리잡게 합니다. 도박하는 사람들을 모두 가시권 안으로 들여 관리하기에 중독 예방도 효과적입니다. 그 결과 홍콩의 도박 중독률은 1.4% 정도로 3.2%인 미국과 2.5%인 영국보다 낮은 수준이며, 불법 도박은 0.1%로 세계 최저 수준입니다. 재정적인 목표를 극대화하면서 공공성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 홍콩 자키 클럽이 10여 년간 38억 홍콩달러(약 5,963억 원)를 투자한 사업이 있습니다. 옛 중앙 경찰서, 중앙 관공서, 교도소로 이루어진 타이쿤(Tai Kwun)을 재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보통 교도소를 도심 외곽에 두는데, 필요 기관을 한 데 모아 두어 원스톱으로 사법 절차를 집행할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적입니다. 영국이 홍콩을 점령하면서 1864년부터 1925년까지 센트럴 지역 8,430평 부지에 차례로 지어졌으며, 16개의 건물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영국 빅토리아 양식의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베트남 정치 지도자 호치민이 수감된 이력이 있는 등 역사적 의미도 깊습니다.

 

<<< 과거에는 높은 담벼락으로 위압감을 주던 곳이었지만 어느덧 타이쿤 높이를 훌쩍 뛰어넘는 초고층 건물에 둘러싸여 빽빽한 도심의 밀도를 낮춰주는 역할을 합니다. ⓒ홍콩 자키 클럽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고고한 박물관으로만 남겨둘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 프로젝트를 맡은 이상 홍콩 자키 클럽은 타이쿤에서 발생하는 수익과 비용 모두를 책임져야 합니다. 복원을 위한 초기 투자 비용은 물론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유지 비용도 클테니, 이를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탄탄한 수익 창출 방안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상업 시설처럼 접근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역사 유적지로서의 공공성과 상업성과의 균형을 고민해야 합니다. 마침 2008년 정부 주도의 ‘역사적 건물 재활성화’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헤리티지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사회적으로 광범위한 논의가 벌어지던 차였습니다. 나름 홍콩 사회에서 명망 높은 홍콩 자키 클럽의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걱정 반, 의심 반의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다행히 2018년 5월, 10여 년만에 문을 연 타이쿤은 사람들의 불안을 깔끔하게 잠재웠습니다. 타임지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장소 2018’로 선정하기도 하고 1년간 340만 명이 방문하는 등 명실공히 핫플레이스가 되었습니다. 유적지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 구조에 손대지 않되 재해석한다

 

타이쿤은 기존 건물을 거의 변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어졌을 당시의 원상태를 복원하기 위해 상당한 추가 자금과 시간을 들였습니다. 벽면 갈라짐을 해결하기 위해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 복원 작업을 했던 전문가를 초빙하기도 하고, 32번 덧칠된 페인트를 사포로 문지르지 않고 고압 수증기로 벗겨내고, 정 복원이 어려울 때는 비용이 수 배에 달하더라도 영국으로부터 자재를 맞춤 주문해 대체했습니다. 법이 바뀌어 건축 구조의 변형이 필요한 경우에도 갖은 방법을 동원해 예외적으로 보존 허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현 규제 하에서는 16단 이상으로 연속된 계단을 만들 수 없지만, 1층부터 3층까지 방향 전환 없이 길게 이어진 일자형 계단을 보존하기 위해 3톤 하중 테스트를 하고 미끄럼 방지 자재를 덧대며 안전성을 증명했습니다. 이렇게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타이쿤이 150여 년간 축적해 온 시간이 차별성의 근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공들여 지켜낸 하드웨어의 효용을 높일 차례입니다. 타이쿤의 공간들은 바, 카페, 레스토랑, 편집숍 등으로 용도를 바꿨는데, 바뀐 용도와 공간의 구조가 유기적으로 결합됩니다. 미치 애초부터 이 용도로 쓰기 위해 만든 것처럼 공간의 구조적 특징을 충분히 활용하는 방향으로 운영합니다. 빅토리아 교도소의 E홀을 칵테일 바로 바꾼 ‘비하인드 바(Behind Bars)’가 대표적입니다. 감옥에서 한잔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되지만, 긴 복도를 중심으로 1평 남짓한 독방이 양쪽에 길게 늘어선 감옥 특유의 구조를 영리하게 활용한 덕에 더욱 술맛이 돕니다.

 

 

일단 독방 구조를 살려 프라이빗한 룸으로 만듭니다. 독방 사이의 벽을 외곽 프레임만 남기고 터두어 너무 답답하지 않게 만드는 동시에 옆방과 적절히 분리합니다. 자연히 손님들이 다른 독방을 거치지 않고 독방의 쇠창살 문으로 각각 출입하기에 프라이버시가 보장됩니다. 각 독방의 좌석이 중앙 복도를 향해 있기에 옆방과 불필요하게 시선을 주고 받는 일이 줄어듭니다. 손님이 계산대에 와서 주문하고 직접 가져가는 주문 방식도 감옥의 독방 구조와 잘 어우러집니다. 만약 자리에서 주문을 받거나 술을 자리로 가져다주면 서버가 독방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공간이 협소하거니와 독방의 프라이빗함을 잠시나마 해치게 됩니다. 또한 사람들이 몰리는 계산대와 픽업 카운터를 좌석이 있는 반대편 라인에 두어 동선을 정리함으로써 독방의 프라이빗함을 더욱 지켜줍니다. 이렇듯 비하인드 바에서는 옛 감옥이라는 공간이기에 가능한 것들을 구현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감옥에서 마시는 칵테일의 맛 – 비하인드 바’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감옥 식단을 전시한 D홀 끝에 간편식 레스토랑을 두고, 경찰서 본부 건물 2층의 통행용 아케이드 공간에 레스토랑 테이블을 두어 퍼레이드 광장을 조망할 수 있게 했으며, 교도소의 널찍한 야외 세탁장은 계단을 의자 삼아 관람할 수 있는 200석 규모의 공연장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찰떡같은 용도를 더해줌으로써 사람들이 옛 공간들을 보다 충분히 향유할 수 있습니다.

 

<<< 타이쿤 밖에서 본 JC 컨템포러리와 F홀입니다. 석조 외벽과 JC 컨템포러리의 알루미늄 외피의 패턴이 닮아 세트처럼 보입니다. ⓒ헤르조그 & 드 뫼롱
<<< JC 큐브의 알루미늄 외피를 자세히 보면 패턴이 불규칙한 석조 외벽을 벤치마킹해 구멍의 크기, 방향, 간격이 모두 다릅니다. 구멍 사이로 보이는 공연장은 실내 공연장이며, 1층 이하는 세미 야외 공연장으로 씁니다. ⓒ헤르조그 & 드 뫼롱

 

타이쿤에서는 새로움도 오래된 것을 닮았습니다. 갤러리와 공연장으로 사용할 공간이 필요한데 층고가 높고 기둥이 없어야 하는 등 기존 건물을 변용하기는 어려워서 2개의 건물을 새로 지었습니다. 교도소 부지에 지은 갤러리 JC 컨템포러리(JC Contemporary)와 공연장 JC 큐브(JC Cube)입니다. 하지만 주변과 어우러지게 만들겠다고 해서 신축 건물을 일부러 낡은 느낌으로 짓는다든지 기존 건물을 복제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신축 건물이 어설퍼 보이고 오히려 구 건물 간 위계가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대신 두 신축 건물은 과감하게 다른 자재를 사용하고 주변 석조 외벽의 패턴을 차용했습니다. 이로써 분명한 새로움을 더하는 동시에 조형적으로 주변과 조화를 이룹니다. 석조 외벽의 벽돌을 쌓아올린 방식, 벽돌 간 간격, 각 벽돌의 비율 등을 따와  알루미늄 블록으로 외피를 구현한 것입니다. 알루미늄 블록마다 구멍이 뚫려있는데 구멍의 모양과 구멍이 향하는 방향, 블록 간 간격도 불규칙적입니다. 석조 외벽의 불규칙한 패턴을 반영한 것입니다. 너무 빈틈 없이 빽빽하게 쌓여있다면 답답했을 수 있는데 구멍이 뚫려 어느 정도 내부를 볼 수 있고 변칙적이라 숨통이 트입니다. 또한, 건물 사이, 공중 등 자투리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지은 덕에 물리적으로도 주변 건물과의 간격이 최소화되었습니다. JC 컨템포러리는 F홀과, JC 큐브는 D홀 및 E홀과 다리를 놓아 서로 연결되도록 해 신구가 한 몸이 됩니다.

 

#2. 다시 올 이유를 만든다

 

그런데 타이쿤은 왜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까지 갤러리와 공연장을 조성했을까요? 다시 올 이유를 주기 위함입니다. 홍콩은 늘 새로움을 탐닉합니다. 어지간한 핫플레이스도 첫 몇 달 반짝 붐비다가 이내 관심 밖으로 밀려납니다. 죄를 짓지 않는 이상 교도소와 경찰서에 올 일은 없을테니, 태어날 때부터 도심 한복판에 커다랗게 자리한 저 ‘큰 집’을 개방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방문한 타이쿤에 깨끗이 단장한 16개의 사적만 덩그러니 있다면? 아무리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고 한들, 공간이 아무리 고즈넉한들 또 방문할 유인이 떨어집니다. 다시 오게 만들려면 주기적으로 바뀌는 콘텐츠가 필요합니다. 이에 전시와 공연만한 것이 없습니다.

 

<<< JC 컨템포러리의 스파이럴 계단입니다. 전시만큼이나 영감을 주는 인테리어입니다. ⓒDFKL photography
<<< 원래 야외 세탁 작업장으로 쓰던 곳을 공연장으로 바꾸었습니다. JC 큐브의 1층 이하를 비워둔 필로티 구조 덕에 지붕이 생겨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공연할 수 있습니다. ⓒ헤르조그 & 드 뫼롱

 

JC 컨템포러리에서는 개장 후 36번의 현대 미술 전시가 열렸습니다. 홍콩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전시를 하기도 하고, 무라카미 타카시 등 전 세계적으로 이름난 작가의 전시가 선보이기도 합니다. 언제 오든 동시대의 최전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편 JC 큐브에서는 지난 1년 간 연주, 연극, 발레 등 90여 팀이 라이브 공연을 했고, 영화 상영회와 페스티벌도 정기적으로 주최하고 있습니다. JC 큐브는 실내 공연장 외에도 지붕이 있는 야외 공연장도 있습니다. JC 큐브는 2층부터 공간을 올리고 1층은 비워둔 필로티 구조이기 때문에 이 빈 공간을 활용하면 날씨와 상관없이 야외 공연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해가 뜨겁고 비가 자주 오는 홍콩에 안성맞춤입니다. 200석 규모에 뒷편의 광장으로까지 연결되기에 필요 시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합니다. 이 외에도 타이쿤 내 6곳이 대관에 열려있습니다. 20명 규모의 스튜디오부터 560명 규모의 퍼레이드 광장까지 옵션이 다양해 행사 규모나 용도에 맞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역사 유적지에서 하는 워크샵이라니, 평범한 이벤트도 잊지 못할 경험으로 만들어 줍니다.

 

 

전국에 몇 없거나 타이쿤에 유일무이한 상업 공간들도 재방문의 이유가 됩니다. 타이쿤에는 총 34개의 레스토랑, 바, 샵 등이 있는데 이 중 대부분이 플래그십 스토어입니다. 앞서 언급한 비하인드 바는 물론, 아이언 페어리즈(The Iron Fairies)와 오펠리아(Opheliea) 등 상상 속의 이야기를 칵테일 바로 구현해 인기인 디자이너 애슐리 서튼(Ashley Sutton)이 잠자리를 컨셉으로 해 만든 신상 바 드래곤플라이(Dragonfly)도 이목을 끌었습니다. 유명 F&B 그룹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브랜드인 아한(Aaharn), 카페 클로델(Cafe Claudel), 올드 베일리(Old Bailey) 등도 기대를 모았고, 온라인으로만 판매하던 피닉스 스위츠(Phoenix Sweets)가 낸 첫 오프라인 매장도 입점되어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마카세 전문점 스시 조(Sushi Zo)도 홍콩 진출의 첫 거점을 타이쿤에 잡는 등 몇 가지만 예시적으로 나열해도 이 정도입니다. 레스토랑이나 바는 네임 파워가 있는 곳들 위주로 선정해 화제를 몰았다면, 상품 판매숍의 경우 작은 로컬 브랜드들 위주로 입점해 고유함과 다양성을 더합니다. 움직임이 있는 키네틱 악세서리 전문점 플레이백 컨셉(Playback Concepts), 생활에 아이디어를 더하는 제품 셀렉샵 글루 어소시에이츠(Glue Associates) 등 신선한 로컬 브랜드가 확장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이렇듯 타이쿤은 일회성 방문에 그치지 않도록 다시 와야할 이유를 다변화하고 있습니다.

 

#3. 역사 콘텐츠를 현재 버전으로 업데이트한다

 

요새 레트로가 유행입니다. 과거에 대한 향수, 과거로 회귀하는 복고라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레트로의 주요 소비층은 과거에 대한 경험이 없는 젊은 층이 많습니다. 즉, 경험해 보지 않았더라도 과거의 것이 고유하고 모방할 수 없는 것이기에 가치를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 공간을 활용할 경우 이 공간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을 잘 살려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야기들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면 알고 싶지 않은 정보가 되어 버립니다. 이를테면 현판에 깨알같은 글씨로 적어둔다거나, 공간과 관련있는 물건을 덩그러니 전시하는 것 등이 일반적입니다. 어떻게 하면 은근하고 세련되게 공간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까요?

 

 

타이쿤은 타이쿤에 관한 20가지의 뒷 이야기를 장소 특정적으로 전달합니다. ‘장소 특정적’이란 그 장소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든다는 말입니다. 먼저 빅토리아 교도소 B홀에서는 교도소에서의 생활이라는 주제로 미디어 아트 전시를 합니다. 어떤 형벌을 받는지, 어떤 침실을 쓰는지, 독방 안에서 보통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어떤 노역을 하는지, 치료는 어떻게 받는지, 탈옥을 시도하던 사람들은 어떤 방법을 썼는지 등 방마다 주제를 바꿔 움직이는 사람 그림자를 독방의 벽에 영사합니다. 마치 독방에 있는 사람을 관찰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각 방마다 패드를 부착해 영사할 콘텐츠를 인터랙티브하게 바꿀 수 있고 상세한 설명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 타이쿤을 거쳐 간 이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타이쿤의 100가지 얼굴’이라는 주제의 전시를 열었습니다. ⓒRetail Design Blog

 

아울러 숨겨진 역사를 발굴합니다. 물론 경찰서, 법원 등이 기록을 중시하는 기관인 만큼 중앙 경찰서에는 사진과 문서 등 자료를 다량 보유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유명 사진 작가를 초청해 5주 동안 타이쿤을 샅샅이 촬영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요새는 정사 뿐 아니라 야사도 중요합니다. 야사를 통해 구체적이고 다각적으로 과거의 빈 퍼즐을 맞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이쿤은 이 공간을 거쳐간 사람들을 찾아 야사를 써내려 갑니다. 경찰관, 경찰관의 가족, 교도관, 인근 주민, 심지어 재소자까지 인터뷰해서 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간 주목되지 않았지만 살아있는 증언들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인용구의 형태로 타이쿤의 공간 곳곳에 녹아 들어 있습니다. 딱딱한 역사적 사실만 나열하는 것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이기에 와닿습니다. 타이쿤 플레이라는 어플을 통해 도슨트를 들을 수 있고, 이 인터뷰를 토대로 ‘타이쿤의 100가지 얼굴’이라는 전시를 별도로 열기도 했습니다. 경찰 기숙사로 쓰이던 버락 블록(Barrack Block)의 헤리티지 갤러리에는 이 인터뷰에 응했던 사람과 기관들의 간단한 프로필을 각각 적어 차곡차곡 우편함 같은 곳에 꽂아두었습니다. 아직 다 채워지지 않은 슬랏이 더 많은 숨겨진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합니다. 이 모든 노력들이 타이쿤을 더욱 고유하게 만듭니다.

 

살아있는 박물관이 되기 위한 조건

 

<<< 1970년대에 보수하는 과정에서 홍콩 정부 상수도부 건물에 쓰고 남은 파란색 페인트로 외벽을 칠하면서 블루 하우스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완차이에는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쨍한 파란색의 4층 짜리 맨션이 있습니다. 바깥에 빨래가 널려있고 베란다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있는 걸로 보아 사람이 살고 있는 듯 합니다. 블루 하우스(Blue House)라 불리는 이 건물은 1922년 지어져 병원, 지압 클리닉, 개인 학교, 공동 주택 등을 거쳐 온 역사의 산 증인입니다. 홍콩 정부는 1978년 블루 하우스를 사들여 1급 사적으로 지정한 후 2006년 이를 리모델링해 생활사 박물관으로 만들겠다며 33가구 주민들에게 퇴거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극빈층이었던 주민들이 극렬히 반대하며 7개월 남짓 시위를 벌였습니다. 결국 2~4층에는 주민들이 그대로 거주하고 1층의 한 칸만 이들의 일상을 전시한 생활사 박물관으로 활용하는 절충안이 채택되었습니다.

 

“흔히 보존을 이야기할 때 물리적인 구조만 유지하는 것을 생각하기 쉽다. 블루 하우스는 그 안에 있는 삶을 지속시키는 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새롭고 의미있는 시도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민현식 교수의 평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보존인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공간이란 본래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을 뜻하며,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됩니다. 아무리 잘 꾸미고 가치 있는 공간도 드나드는 사람이 없으면 금방 낡고 못 쓰게 됩니다. 블루 하우스에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하는 건, 저 역사적인 건물에 여전히 사람들이 살아가며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데서 오는 울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민들을 전부 내보내고 전 층을 박물관으로 만들었다면? 보존이라는 미명 하에 공연히 생명력을 잃게 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박물관으로 만드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보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유적지의 활기를 이어가는 기술을 타이쿤의 사례를 통해 엿보셨길 바랍니다.

 


우연이 끼어들 여지가 여행을 여행답게 만듭니다.”

여행의 묘미를 느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계획한 일정을 숙제하듯 소화할 때가 아니라, 뜻밖의 상황을 느닷없이 마주칠 때입니다. 예정에 없었던 대화, 있는 지도 몰랐던 공간, 상상하지 못했던 제품, 경험하기 어려웠던 현상, 기대하지 않았던 디테일 등이 여행의 가치를 높여줍니다. 그래서 여행을 할 때 계획을 세우는 건 중요하지만, 우연이 끼어들 여지를 남겨둘 필요도 있습니다. <생각이 기다리는 여행>은 여행에서 우연이 끼어들 여지가 선물해 준 생각지도 못한 생각들에 대한 기록이자, 계획할 수 없었기에 더 소중한 여행의 조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