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bpx

야채만으로 정면 승부하는 샐러드바 – 농가의 부엌

역설적이게도 보통의 샐러드바는 채소가 메인이 아닙니다. 드레싱에 흠뻑 버무려져 있어 채소맛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고, 그마저도 양식, 중식, 일식, 한식 등 다른 메뉴를 거드는 구색일 뿐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농가의 부엌에서는 채소가 진짜 주인공입니다. 20여종의 채소를 날 것 그대로 내놓습니다. 생야채를 내놓는 자신감은 이 채소를 어디서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데서 나옵니다. 농가의 부엌이 야채만으로 정면 승부할 수 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Quick View

 

• 들어가며

• 샐러드 단독 주연의 샐러드바

• 원산 ‘농사’ 원천 공개

• 페라리를 타는 사람보다 만드는 사람이 더 멋있는 사회를 그리며

• 성인비디오와 농업과의 기묘한 연결고리

 

본 콘텐츠는 읽는 데 총 6분 정도 소요됩니다.


 

일본과 한국 중 엥겔지수가 더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요? 엥겔지수는 총지출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으로, 소득이 낮을수록 엥겔지수가 높게 나타나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본보다 한국의 엥겔지수가 더 높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전세계 세번째 경제대국 일본의 엥겔지수는 26%로 한국의 14%보다 약 2배 더 높습니다. 게다가 4년새 수치가 꾸준히 증가하는 중입니다. 벌이가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식비 지출이 절대적으로 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웰빙이 국민 식습관으로 자리 잡아 비교적 단가가 높더라도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에 돈을 쓰는 데 관대합니다. 건강이 삶의 최고 화두인 고령층 뿐 아니라 혼밥 인구의 증가도 이런 현상을 가속화하는 데 한 몫 합니다. 1인 가구는 매 식사를 본인이 선택하기에 가치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더 많습니다.

 

 

수요가 변하면 공급도 변합니다. 샌드위치 체인점 ‘서브웨이’는 도쿄 마루노우치에 ‘야사이라보(野菜ラボ)’라는 점포를 열었습니다. 채소 연구소라는 뜻으로 매장 안에서 직접 양배추를 재배합니다. 주방 안쪽도 아니고 매장 정중앙에서 자리잡았기에 손님들이 양배추를 바라보며 식사를 하는 생경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이렇게 매장에서 재배하고 갓 수확한 양배추로 신선한 샌드위치를 만듭니다. 그간의 패스트푸드 이미지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일본인들에게 소구하기 위함입니다. 또, 유기농 신선식품 배달업체 ‘오이식스’는 도쿄 증시에 상장될만큼 사업적 가능성을 증명했습니다. 원래 신선식품은 특성 상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의 전환이 가장 느린 카테고리입니다. 토마토 3개, 감자 5알 등 ‘소포장 묶음 배송’과 ‘주문 후 수확’이라는 오이식스의 원칙이 시대적 흐름과 만나며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2013년 상장 후 지금까지도 성장세를 유지하며 꾸준히 매출을 증가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요식업 웰빙 사례가 일본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 역시 온라인 신선식품 배달업체가 핫하고, 건강한 밥상을 표방하는 식당이 속속 늘고 있습니다. 방향성은 같되, 시점과 정도가 다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보다 한 보 앞서 웰빙의 본질에 가까워지고 있는 일본의 사례에서 참조할 점이 많습니다. 웰빙하면 먼저 떠오르는 샐러드바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미 한국에도 샐러드바 수십여곳이 성행 중이라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샐러드바의 차별적 경쟁력이 궁금하다면 ‘농가의 부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야채 단독 주연의 샐러드바

 

 

역설적이게도, 보통의 샐러드바는 채소가 메인이 아닙니다. 드레싱에 흠뻑 버무려져 있어 채소맛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고, 그마저도 양식, 중식, 일식, 한식에 이르는 다른 메뉴를 거드는 구색일 뿐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농가의 부엌은 채소가 진짜 주인공입니다. 20여종의 채소를 날 것 그대로 내놓습니다. 깨끗이 씻은 채소를 손님 눈 앞에서 칼로 썰어 그때그때 바로 내놓아 신선합니다. 뿌리 부분을 더 들어내달라든지, 씨앗을 빼지 말아달라든지 등 손님의 취향에 맞게 채소를 다듬어 주기도 합니다. 시저 샐러드, 연어 샐러드, 포테이토 샐러드 등 종류별로 미리 만들어놓는 기존 샐러드바와 다릅니다. 이 곳에서는 원재료인 채소 하나하나가 충실히 제 역할을 하며 최상의 맛과 신선함을 자랑합니다. 채소를 하나씩 맛보며 어떤 채소가 어떤 맛, 향, 식감을 내는지 새삼 인지합니다. 이 중에서 취향을 저격한 채소가 있다면 현장에서 구입할 수도 있습니다. 재료를 그대로 내놓기에 레스토랑 겸 야채가게가 가능합니다.

 

 

날 것이 아닐 때 더 맛있고 영양가 있는 채소들도 있습니다. 그런 채소들은 굽기, 찌기, 데치기, 볶기 등 최적의 조리방법으로 조리해 내놓습니다. 예를 들어 당근은 적절히 잘 찌면 부드러운 식감과 자연스러운 단맛을 느낄수 있으며 향도 순해집니다. 또한 당근의 풍부한 비타민 A는 지용성이라 올리브에 볶았을 때 체내 흡수율이 상승하고, 팔카리놀이라는 항암 성분은 열을 가할 때 더 많이 나와 암예방에 좋습니다. 샐러드바 한 켠에 조리 야채 코너를 두기도 하고, 여러 야채를 모아 끓이는 핫팟도 단품으로 인기가 좋습니다. 단, 조리를 하는 경우도 조미는 최소화합니다. 자극적인 양념이 채소 본연의 맛을 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제 드레싱도 매일 생야채로 만들어 겉돌지 않고 채소와 잘 어우러집니다. 육류나 해산물이 들어간 단품 메뉴들도 수북한 야채가 기본입니다. 농가의 부엌에서 채소 이외의 모든 것은 채소를 돋보이기 위한 조연입니다.

 

생야채를 그대로 내놓는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이 채소 셀렉션을 어디서도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배추, 치커리, 청경채, 케일, 토마토, 파프리카, 가지, 호박 등 분명 우리에게 익숙한 채소입니다. 그런데 먹어보면 맛이 다릅니다. 단순히 유기농으로 건강하게 자랐다는 느낌 이상입니다. 종자를 개량하고, 새로운 작법을 채택했기에 가능한 오리지널입니다. 예를 들면, 껍질까지 그대로 먹을 수 있는 호박, 바닷가에서 키운 토마토, 짠맛이 돌아 천연 소금간 역할을 하는 솔트 리프 등 각 채소마다 정체성이 확실합니다.

 

유통 방식을 바꾸는 것으로도 차별성이 생깁니다. 이를테면 보통 토마토는 파랗고 단단할 때 미리 수확합니다. 수확할 때나 운송할 때 터져버릴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후 운송하며 서서히 ‘후숙’하는데, 가지에 매달린 채 땅과 태양의 기운을 한껏 빨아들이며 자연스럽게 익는 토마토와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농가의 부엌은 토마토가 절정일 때 수확해 최대한 그 상태 그대로 맛볼 수 있도록 운송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데 집중합니다. 직접 밭에 가야 비로소 경험할 수 있던 맛을 도심 한복판에서 누린다는 점에서 역시 유일무이합니다. 신주쿠 지점이 아예 점내에 버섯 재배실을 갖춘 것도 그 일환입니다. 저녁 시간에 가면 매장에서 갓 수확한 버섯을 먹을 수 있습니다.

 

원산 ‘농가’ 원천 공개

 

 

맛있고 희소합니다. 여기에 신뢰도까지 더하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농가의 부엌은 단순 원산지 표시를 넘어 500여개의 거래 농가들을 직접 소개합니다. 농가의 부엌이 한땀한땀 엄선한 ‘도쿠노카(篤農家)’입니다. 도쿠노카란 철학과 노하우를 갖고 독창적이고 품질 좋은 농산품을 재배하기 위해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농가를 가리킵니다. 그렇기에 소개할 콘텐츠가 풍성합니다. 직원들이 채소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며 자연스레 농가 소개까지 겸하는 건 기본입니다. 이 외에도 메뉴, 벽면 등 온 매장에서 농가를 이야기합니다. 선거 포스터처럼 디자인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농부의 얼굴과 이름이 큼지막하게 박혀있고, 정당명과 슬로건까지 있습니다. 정당명에는 특유의 재배법을, 슬로건에는 농가의 신조와 철학을 담았습니다. “벼농사도 그만 뒀다. 연근 외길 35년”, “농사를 짓는다기보다는 자연을 즐기고 있습니다” 등 재치있고 개성 넘치는 문구들입니다. 이미지 또한 구슬땀 흘리는 농부의 진지한 모습부터 화면을 뚫고 나올 듯한 대범한 제스쳐를 취하는 재기발랄한 모습까지 다양합니다. 수경재배가 특징인 농가는 하늘색 글씨로 쓰는 등 농작물의 특성을 반영해 디자인 색상을 정하고, 사진 속 소품 색상과 맟추는 등 센스가 곳곳에 묻어납니다.

 

선거 유세는 온라인에서도 이어집니다. 오프라인에서는 지면이 한정적이니, 온라인에서 압축 해제하여 보다 자세하게 농가를 소개합니다. 더 나아가 마음에 드는 채소를 재배한 농가에게 투표할 수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인기 투표 결과를 발표하고 연말에는 연간 종합 순위도 공개합니다. 전국에서 쌀을 수합해 직원들이 시식한 뒤 그 해의 베스트 6를 선정해 소개하는 ‘쌀 릴레이’, 어느 농가의 토마토가 더 맛있는지 겨루는 ‘토마토 고교 야구 선수권’도 엽니다. 엔터테인먼트와 게임 요소를 더해 사람들에게 더욱 친숙하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개최되는 농업, 식품 관련 이벤트를 농가의 부엌 셰프와 직원들이 직접 취재해 소개해 신뢰를 더합니다. 고객이 농가에 있는 부엌에 온 듯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열렬히 소개한 농가들을 가만 들여다보면 젊은 농부들이 많습니다. 농부인 부모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대를 이어간 도쿠노카의 자식들도 있습니다. 젋은 여성 농부들도 눈에 띕니다. 이들은 원조 도쿠노카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가되, 새로움에 더욱 적극적이고 실행력도 탁월합니다. 농가의 부엌의 신선한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잘 어우러져, 힙하고 패셔너블한 이미지를 주는 데 한 몫을 합니다. 농가 스스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는 것과 별개로, 사회의 인정도 함께 가야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농가의 부엌의 살뜰한 농가 소개가 단순히 원산지에 대한 신뢰감 증진만을 기대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페라리를 타는 사람보다 만드는 사람이 더 멋있는 사회를 그리며

 

그저 소싱 잘하는 컨셉력 좋은 레스토랑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이는 것 이상으로 농가의 부엌의 뿌리는 깊고 이상은 높습니다. 창업자 가나리 타카야시는 생산자가 제대로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농업의 구조는 다분히 유통업자 편의에 따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토마토의 사례처럼, 유통 시간이 길어지고 다소 거칠게 다뤄도 괜찮은 농작물과 유통, 판매 방식을 선택합니다. 더 좋은 농작물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농부들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소비자들도 평준화 된 농산품만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에 세계 최고 수준인 농가 보조금도 농가들이 노력할 유인을 줄여 하향 평준화를 가속화시킵니다.  일본 농가는 소득의 50%를 보조금으로 충당합니다. 그리하여 1) 제대로 된 생산자를 발굴하고 2) 이들의 생산물을 최대한 원형 그대로 전달하며 3) 소비자들이 그 가치를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알리고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 가나리 타카야시의 미션이었습니다. 농가의 부엌 매장은 세번째 미션을 위한 전초기지입니다. 매장을 열기에 앞서 첫번째, 두번째 미션을 달성하기 위해 2006년 ‘구니타치팜’이라는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구니타치팜은 ‘야마가타 걸즈’와 ‘솔트 리프’라는 농가를 직접 운영합니다. 생산자와 동일선상에서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제대로 된 솔루션을 내기 위한 내부의 장치입니다. 야마가타 걸즈는 여성 농부로 이루어진 농가로, 여성의 시선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주요 소비자인 여성과 주부를 공략할 수 있도록 상품 개발부터 패키지, 판매처,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고민합니다. 여기에 더해 젊은 여성들의 농업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도록 캠페인도 활발히 전개합니다. 또다른 생산 법인 솔트리프는 혁신적인 농산품을 개발하는 연구형 농가입니다. 대표 상품은 ‘솔트 리프’로 짠맛이 있어 천연 소금간을 해주는 채소입니다. 프랑스산 종자를 가져와 개량한 채소로, 수포가 있어 입에서 터지는 듯한 식감도 재미있습니다. 이렇듯 이들의 과감한 시도는 거래 농가 전체에 활력과 방향성을 주기도 합니다.

 

허나 유통이 그대로면 제아무리 도쿠노카의 조상이 와도 바뀌는 것이 없습니다. 일본 농산물 유통은 한국의 농협과 유사한 JA(Japan Agricultural Cooperatives)가 대부분 담당합니다. 가격이 출렁이지 않도록 선구매, 도매입 등을 하고 한해 수확량에 따라 출하량을 조절하는 등 선기능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현재의 경직되고 보수적인 일본 농업을 만든 주범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농업계 유통 공룡을 일개 회사가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구니타치팜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시작합니다. 그들이 발굴한 농가들과 농가의 부엌 매장 사이 유통 핫라인을 뚫어둔 것입니다. 이로써 산지 유통인, 도매시장 법인, 중간 도매인, 소매점 등 기본 4단계를 거치는 유통 수수료를 절약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대로 된 농작물을 알아봐주고 제값을 치르는 소비자에 직접 닿을 수 있습니다. 생산-유통-판매가 촘촘히 연결되어있기에 가능합니다.

 

사업 초기에는 농가의 부엌에만 납품했지만, 점점 유통망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키치조지, 신주쿠 등 고급 레스토랑에도 들어가고, 거래 레스토랑들은 쿠니타치팜에서 공급받은 채소를 셀링 포인트로 삼습니다. 농가의 부엌을 위시한 구니타치팜의 브랜딩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아울러 자체 온라인 스토어에서 소비자들에게 직접 판매도 하고 있습니다. 유통업은 대표적인 인프라 사업으로 고정비가 높습니다. 도매업과 온라인까지 영역을 넓히며 고정비를 상쇄하는 행보에서 지속가능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성인비디오와 농업과의 기묘한 연결고리

 

‘SOD(Soft On Demand)’라는 성인 비디오업계 내 입지전적인 기업이 있습니다. SOD의 존재감을 알기 위해서는 1990년대 일본 성인 비디오 업계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당시 성인비디오 제작사에게는 2가지 제약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일본비디오윤리협회’의 심의를 거쳐야 비디오 렌탈샵 유통이 가능했습니다. 일명 비데륜으로 불리는 이 협회는 정부기관이 아닌 퇴역 경찰들의 사조직으로, 일관되지 않은 심사기준과 권력 오남용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영세 메이커들은 판매용 비디오로 자체 유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는, 비디오 렌탈 업체들의 경쟁으로 비디오 대여료가 100엔대로 수렴하는 통에 메이커의 제작 원가 압박이 심해졌습니다. 유통업계의 상황에 맞춰 제작물의 퀄리티가 전반적으로 낮아지게 됩니다. 유통에 게이트키퍼가 있다는 것, 양질의 생산자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유통업계의 편의에 맞춰 하향 평준화된다는 점에서 지금의 농업계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1995년에 출범한 SOD는 2가지 방향에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첫째는, 미디어윤리위원회를 설립해 유통에 뛰어들었습니다. 렌탈계가 아닌 판매용 비디오계의 영세 레이블들을 규합하며 진영을 만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단 비데륜의 각박한 30분 러닝타임, 모자이크 사이즈 제한 등을 풀었습니다. 이로써 과감한 기획물들이 빛을 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DVD 포맷을 일찌감치 받아들여 비데륜의 VCD, VHS 화질을 뛰어 넘은 것도 주효했습니다. 비데륜이 공식 인증 기관은 아니기에 그들의 심사 기준만이 인정된다든지 법적 효력을 갖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업계의 ‘만들어진’ 관행이었을 뿐입니다. 미디어윤리위원회의 과감함과 파격이 소비자로부터 힘을 얻자, 점차 이들의 심의 기준이 업계의 표준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둘째는, SOD Create라는 제작 회사를 통해 ‘기획의 디맨드’로 거듭납니다. 유명 여배우 없이도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기획만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흥행에 성공합니다. 이를 본보기 삼아 업계 전반의 제작 기획력이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현재 SOD는 연간 200억 원대의 매출을 올리며 신입사원 모집 경쟁률이 50대1을 넘을 만큼 인기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어쩐지 생산-유통-판매를 수직계열화 한 농가의 부엌의 행보와 닮지 않았나요? 닮은 점이 많은 SOD와 구니타치팜은 모두 가나리 타카야시의 작품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이름난 AV(성인 비디오) 메이커가 돌연 대표직을 내려놓고 농업계로 뛰어든다고 했을 때 CNN 등을 비롯한 외신에서 주목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뒷이야기를 하나 더하자면, 가나리 타카야시는 사실 농업에 관심있던 사람이 아닙니다. AV 업계에서의 노하우를 활용해 성장하고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가장 많은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단순히 좋아서, 취향으로 시작하는 것과 다르게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에서 판단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의 판단이 맞을지는 더 두고봐야합니다. 인터넷 보편화로 성장대로에 있던 AV 업계와는 달리 농업은 개선과 동시에 업 자체의 부흥도 겸해야 한다는 점에서 난이도가 높습니다. 하지만 이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두 비즈니스에서 연결고리를 찾아낸 그의 감각이라면, 앞으로도 더 재미있는 시도들을 기대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우연이 끼어들 여지가 여행을 여행답게 만듭니다.”

여행의 묘미를 느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계획한 일정을 숙제하듯 소화할 때가 아니라, 뜻밖의 상황을 느닷없이 마주칠 때입니다. 예정에 없었던 대화, 있는 지도 몰랐던 공간, 상상하지 못했던 제품, 경험하기 어려웠던 현상, 기대하지 않았던 디테일 등이 여행의 가치를 높여줍니다. 그래서 여행을 할 때 계획을 세우는 건 중요하지만, 우연이 끼어들 여지를 남겨둘 필요도 있습니다. <생각이 기다리는 여행>은 여행에서 우연이 끼어들 여지가 선물해 준 생각지도 못한 생각들에 대한 기록이자, 계획할 수 없었기에 더 소중한 여행의 조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