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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아트 도쿄 2018 #3. 전시가 빛낸 브랜드 정체성

지난 10월, 도쿄에서는 올해로 두 번째를 맞이한 ‘디자인아트 도쿄(Designart Tokyo)’가 열렸습니다. 말 그대로 도쿄 전체가 하나의 미술관이 되어 80여개의 전시가 동시에 진행됩니다. 카페, 갤러리, 편집샵, 상점 등 도쿄에 있는 크고 작은 장소들이 전시장으로 활용됩니다. 발품을 팔아 돌아다니며 눈에 담았던 디자인아트 도쿄 현장을 총 4편에 걸쳐 소개합니다.


시간은 자연에 있는 개념일까요? 우리가 인지하는 것은 시계의 시간이지, 자연의 시간이 아닙니다. 즉, 시계 없이 시간을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연 속 시간에는 시, 분, 초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 속에서 시간은 흐를 뿐, 단위로 끊어서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시간을 인지하고 공유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시계가 정의하지 않는 본연의 시간을 시계 회사가 이야기한다면 어떨까요? 일본 최초의 손목시계를 만든 회사이자, 일본 시계의 자존심인 ‘세이코(SEIKO)’가 그 역설의 시공간을 재현해내며 황홀경을 선사했습니다. 오모테산도의 한 지하 암실 공간에서 진행되었던 ‘시간의 흐름(THE FLOW OF TIME)’은 일본 특유의 정제된 미의식, 장인의 혼이 깃든 정밀 기술, 시간에 대한 남다른 철학이 빚어낸 종합 예술이었습니다.

 

<<< 전시는 오모테산도에 있는 한 건물의 지하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 전시를 기획한 사토시 요시즈미(Satoshi Yoshizumi)는 규정되지 않은 자연의 시간을 통해 세이코의 프리미엄 라인인 ‘그랜드 세이코(Grand Seiko)’가 가진 기품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1960년 출시된 그랜드 세이코는 세이코가 스스로를 뛰어넘기 위한 결심이었습니다. 정확도, 내구성, 심미성으로 이상적인 시계가 되는 것을 지향해 왔고, 당시 유럽 시계 브랜드들이 선도하던 프리미엄 시계 시장에서 일본 시계로서 글로벌 스탠다드가 되고자 자기 진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그랜드 세이코는 기술력으로 정확도와 내구성을 꾸준히 개선한 것은 물론, 자연의 시간에서 느낄 수 있는 곡선을 그리는 듯한 움직임을 가진 초침으로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갖추었습니다. 째깍거리는 보통 시계들의 초침과는 달리, 시계판 위에서 미끄러지듯 우아하게 움직이는 그랜드 세이코의 초침은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반영합니다. 그랜드 세이코의 유유한 초침은 인간이 만든 시계와 자연이 품은 시간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세이코가 생각하는 시간의 모습을 제품의 모습으로 구현해낸 것입니다.

 

<<< 암실 같은 전시장에 들어서자, 거대한 미디어월과 귀금속을 진열해 둔 듯한 디스플레이가 관람객들을 맞이합니다.

 

뒤편의 넓은 미디어월은 도시의 풍경, 밤하늘 등 일상 속 풍경들을 촬영한 영상으로 시간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움직이는 영상 속 풍경에서 속도감 있는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미디어월 앞 물방울 모양이 투명한 아크릴 조형들 안에는 시계를 구성하는 부품들이 제각각 진공 상태에 떠 있는 것처럼 배치되어 있습니다. 아크릴 조형들을 천천히 살펴 보다 보면, 따로 떨어져 허공을 부유하는 듯한 시계 부품들이 결국 하나의 시계가 되어 움직일 때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게 됩니다. 시계 부품들의 빈틈없는 조화는 그랜드 세이코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낳을 것입니다. 미디어월이 보여주는 시간의 흐름이 아크릴 조형을 통과하면서 시계가 세상의 시간을 담는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미디어월과 아크릴 조형의 조화는 시계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시간의 흐름과, 세상의 변화가 뒤엉켜 흡입력 있는 아름다움을 자아냅니다.

 

‘자연의 시간을 담은 경외할만한 시계’

 

단 몇 분의 전시가 강렬하게 남긴 세이코 브랜드의 이미지입니다. 어떤 광고도, 홍보도 없었지만, 관객에게 회사가 지향하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명확하고 우아하게 전달했습니다. 이게 바로 예술이 비즈니스 세계에서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자 가치입니다. 디자인아트 도쿄가 끝나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 전시의 인상에서 브랜드의 생각이 담긴 콘텐츠가 브랜딩의 영역에서 가질 수 있는 영향력을 보았습니다. 회사의 철학을 반영한 예술은 브랜드 정체성을 쌓는 정석이 됩니다.

 

<<< 프랑프랑 포레스트가 디자인아트 도쿄에 참가한다는 사실이 눈에 띌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랜드 세이코의 전시장 바로 옆에는 일본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프랑프랑(Francfranc)’이 운영하는 갤러리인 ‘프랑프랑 포레스트(Francefranc forest)’가 있습니다. 프랑프랑은 아기자기하고 톡톡 튀는 디자인으로 평범할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 제품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이런 프랑프랑의 성격을 반영한 듯, 프랑프랑 포레스트에서는 30세 이하의 젊은 크리에이터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인 ‘언더30(Under30)’에서 선정된 예술가들의 작품과 인테리어 디자인, 순수 예술, 패션, 미디어 아트 등의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크리에이터들의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에피스트로프(Epistroph)’는 사운드 엔지니어, 사진가, 패션 디자이너 등 장르를 불문한 예술가 집단으로, 다양한 장르를 통해 옷을 고르고 입는 것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의도를 가진 전시를 진행했습니다. 현재 일본 문화 씬에 의문을 던지는 셈으로, 이런 역할이 젊은 아티스들이 모인 에피스트로프의 가치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제목인 ‘하늘을 잘라내다(Cut out the sky)’에서 알 수 있듯, 하늘의 빛깔이 퍼뜨리는 그라데이션을 재현해 맑고 푸른 하늘을 볼 때 사람들이 느끼는 상쾌한 감정을 끌어내는 작품입니다. 하늘에서 태양이 빛을 내는 것과 같은 매커니즘을 그대로 활용해 자연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을 복제한 것입니다. 단순한 발상이지만, 그만큼 순수한 감정을 자극합니다.

 

 

공간을 구성하는 가구들은 그 공간의 분위기를 좌우하는데, 그 중에서도 조명은 공간의 무드를 조성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합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히토시 마키노(Hitoshi Makino)는 일본스러운 집에 녹아들 수 있는 아름다운 조명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간결한 원 안의 얇은 금빛 잎은 일본 화폐인 엔화 동전에 쓰이는 구리를 사용하여 일본 전통의 미를 세심하게 살립니다. 동시에 형태적으로는 유럽스타일의 샹들리에를 표방해 현대적인 공간에도 위화감이 전혀 없는 세련된 아름다움을 더합니다.

 

종이책을 비틀어 공간에 압도되지 않고 공간을 채우는 오브제, 130년 전통의 직조 회사가 만든 소파와 쿠션 등 소개한 작품들 외에도 약 20여점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경계 없이 자유로운 영역을 넘나드는 전시에서 사고가 트이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깊이 있는 잔상을 남겼던 그랜드 세이코 전시와는 또다른 신선한 유희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이 뿜어내는 자유분방한 에너지는 관객들과의 관계에서 강렬한 매개로 작용합니다. 연륜이 낳는 작품의 깊이도 좋지만, 영글지 않은 작품의 참신함은 상쾌한 자극이 됩니다. 더불어 이런 색다른 매력은 전시 장소를 제공한 프랑프랑의 브랜드 이미지로도 이어집니다. 건조한 일상에 단비가 될 브랜드로서 프랑프랑이 보여줄 미래가 기대됩니다.

 

마지막으로 다이칸야마에 있는 프랑스 유아동복 전문 브랜드 ‘쁘띠 바또(Petit bateau)’ 매장에서는 브랜드의 역사로 프리미엄 브랜드 이미지에 무게감을 더했습니다. ‘쁘띠 바또’는 프랑스어로 ‘작은 배’라는 뜻인데, 밑둥으로 배의 몸체를, 디자인아트 도쿄 로고 모양의 프레임으로 돛대를 표현했습니다. 작품을 담는 프레임으로도 아이덴티티를 전달하는 아이디어가 재치 있습니다.

 

 

프레임 안의 하얀색 긴 바지는 ‘칼송(Caleçon)’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속옷입니다. 100년 전 프랑스에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겉옷 안에 칼송을 입었습니다. 쁘띠 바또도 여느 옷가게들처럼 전형적인 칼송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평범했던 속옷 가게인 쁘띠 바또가 100년의 역사를 가진 브랜드가 될 수 있었던 출발점은 쁘띠 바또를 운영하던 에티엔느 발통(Etienne Valton)의 작은 상상이었습니다. 어느 날 에티엔느 발통은 물 위를 자유롭게 떠다니는 보트를 보고 보트에 다리가 있냐고 묻는 노랫말에서 다리가 달린 보트를 상상해냅니다. 다리가 달린 보트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모습을 떠올리던 에티엔느 발통은 사람의 다리도 칼송에서 해방되면 보다 자유로운 움직임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작은 상상이 칼송에서 다리 부분을 잘라내고 짧은 반바지 모양의 속옷을 만들어냈고, 사람들의 다리는 비로소 자유를 얻었습니다. 속옷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움을 느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짧아진 칼송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고, 오늘날 팬티의 시초가 됩니다. 이후 쁘띠 바또는 디자인과 소재의 변용을 통해 팬티의 착용감을 점점 더 개선시켰고, 팬티는 쁘띠 바또의 대표 상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유럽에서 온 비싼 아동복 브랜드’였던 쁘띠 바또가 이 오브제 하나로 ‘사람들을 의복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킨 역사적인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이 오브제를 계속 보고 있으면, 브랜드의 역사와 품위가 하나의 타임 캡슐에 압축되어 보존되는 느낌마저 듭니다. 쁘띠 바또가 아니었더라면 지금도 우린 두 개의 바지를 겹쳐 입고 불편함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연이 끼어들 여지가 여행을 여행답게 만듭니다.”

여행의 묘미를 느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계획한 일정을 숙제하듯 소화할 때가 아니라, 뜻밖의 상황을 느닷없이 마주칠 때입니다. 예정에 없었던 대화, 있는 지도 몰랐던 공간, 상상하지 못했던 제품, 경험하기 어려웠던 현상, 기대하지 않았던 디테일 등이 여행의 가치를 높여줍니다. 그래서 여행을 할 때 계획을 세우는 건 중요하지만, 우연이 끼어들 여지를 남겨둘 필요도 있습니다. <생각이 기다리는 여행>은 여행에서 우연이 끼어들 여지가 선물해 준 생각지도 못한 생각들에 대한 기록이자, 계획할 수 없었기에 더 소중한 여행의 조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