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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아트 도쿄 2018 #2. 장소가 빛낸 기획의도

지난 10월, 도쿄에서는 올해로 두 번째를 맞이한 ‘디자인아트 도쿄(Designart Tokyo)’가 열렸습니다. 말 그대로 도쿄 전체가 하나의 미술관이 되어 80여개의 전시가 동시에 진행됩니다. 카페, 갤러리, 편집샵, 상점 등 도쿄에 있는 크고 작은 장소들이 전시장으로 활용됩니다. 발품을 팔아 돌아다니며 눈에 담았던 디자인아트 도쿄 현장을 총 4편에 걸쳐 소개합니다.


디자인아트 도쿄에서 첫 번째 행선지였던 ‘아트리스 크래프트 티 앤 커피(Artless craft tea & coffee)’는 장소의 아이덴티티에 힘입은 전시로 강렬한 첫 인상을 남겼습니다. 카페 겸 갤러리인 아트리스 크래프트 티 앤 커피는 원목 소재와 검정색 메탈을 적절히 활용해 모던하면서도 자연 친화적인 분위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갤러리 안에 음료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이 있고, 카페도 갤러리 못지 않는 미의식이 돋보이는 내부를 갖추고 있어 카페와 갤러리의 경계가 무색합니다. 따뜻한 녹차 한 잔을 시켜 갤러리 공간으로 들어서자 식물로 만든 마네킹이 사람처럼 옷을 입고 고개까지 움직이며 방문객들을 맞이합니다. 불쾌한 골짜기가 낯선 긴장감을 불러 일으킬 법한 이 식물 형상이 갤러리에 등장한 건, 예상 외로 아주 재미있는 아이디어 덕분이었습니다.

 

<<< 아트리스 크래프트 티 앤 커피의 매장 전경입니다.

 

<<< 의인화된 식물들의 모습입니다.

 

<<< 식물로 만든 오브제들도 함께 감상할 수 있습니다.

 

생화나 식물에 다른 소재를 더해 신선한 조합을 만들어 내는 크리에이티브 유닛인 프로펠라하트(Propellaheart)가 기획한 이 전시는 자연과 휴식의 메타포입니다. 자연을 대변하는 식물이 휴식을 상징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신다는 상상으로 양립하는 개념인 자연과 휴식을 표현한 것입니다. 나무 소재로 만들어진 전시 장소의 특성은 전시의 기획 의도에 힘을 실었습니다. 이런 전시의 숨은 의미를 확인하자 의인화된 식물에 긴장하기보다는 의도 있는 기획에 재치를 느꼈습니다. 전시의 기획 의도에 흠뻑 취해 나 역시도 자연 속 휴식을 즐기다 나왔습니다.

 

<<< 벤또에서 영감을 얻은 하코 책꽂이입니다.

 

나카메구로에서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다이칸야마의 테노하(Tenoha)에서는 라이프스타일 편집샵으로서의 역할을 살려 라이프스타일과 관련된 다양한 디자인 제품들을 선보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코 책꽂이(HAKO Shelf)와 카빈 라운지 의자(Kabin Lounge Chair)에서는 디자이너의 일상 속 아이디어와 관점이 돋보였습니다. 먼저 하코 책꽂이는 일본식 도시락 벤또를 보고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를 책꽂이에 대입한 제품입니다. 벤또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반찬을 원하는 양만큼 담을 수 있도록 모듈화된 칸막이가 있습니다. 이런 벤또의 칸막이가 아이디어가 되어 책꽂이의 공간 활용을 세련되면서도 효율적으로 설계한 것입니다. 칸막이의 가로, 세로 사이즈를 다양화하여 책꽂이 틀에 원하는 사이즈의 칸막이를 꽂아 자신만의 책꽂이를 만들 수 있습니다.

 

<<< 앉는 사람이 한 송이 꽃이 되는 카빈 라운지 의자입니다.

 

카빈 라운지 의자의 ‘카빈’은 일본어로 ‘꽃병’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꽃병에 착안해 디자인한 의자입니다. 꽃병이 꽃을 담기 위한 용기라면, 의자는 사람을 담기 위한 가구인 것입니다. 한 송이의 꽃에서 한 명의 사람을 연상해 낸 디자이너의 관점이 기능적 디자인에 낭만적 가치를 더했습니다. 꽃병은 꽃을 꽂기 위해 만들어진 산물이기 때문에, 꽃을 꽂아야 비로소 완성됩니다. 마찬가지로 카빈 라운지 의자도 사람이 앉아야만 완성형이 된다는 컨셉을 갖고 있습니다. 의자에 부여된 컨셉이 앉는 사람의 마음을 다르게 만듭니다.

 

<<< 아키가 디자인한 ‘밤의 책(Night Book)’입니다.

 

다이칸야마 티사이트(Daikanyama T-Site)는 테노하에서 5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있습니다. 티사이트는 서점, 편집샵, 카페, 레스토랑, 카메라 전문점, 애완견 미용실 등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할 만한 다양한 공간들이 모여 있습니다. 책, DVD, 음반을 대여하는 비즈니스로 시작한 츠타야의 플래그쉽 역할을 하는 티사이트는 ‘서점’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중심축에 둡니다. 이런 티사이트에서 책의 이미지를 매개로 한 디자인 제품을 전시하고 판매한 것이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티사이트를 무대로 선보인 제품은 아키(akii)라는 디자인팀이 만든 조명이었습니다. 아키는 원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여는 느낌을 구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느낌을 현실에 구현하면서도,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비현실성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러던 중 영화에서 어두운 도서관에서 발견한 책 한 권이 빛을 발하고, 그 책이 주인공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열쇠가 되는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아키는 이런 아이디어에 착안해 ‘밤의 책(Night Book)’이라는 책 모양의 조명을 만들었습니다. 사용자가 책 모양의 조명을 집어 들면, 자연스럽게 펼쳐보고 싶을 것입니다. 책을 펼치듯 조명을 펼치면,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옵니다. 이 때 사용자는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또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듯,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별할 것 없는 나의 매일 밤이 조명 하나로 영화 속 한 장면이 됩니다. 사용자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디자인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 것입니다. 더 나은 일상이 아닌, 더 나은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이 난무한 시대에 디자인의 의미와 방향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합니다.

 

 

우연이 끼어들 여지가 여행을 여행답게 만듭니다.”

여행의 묘미를 느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계획한 일정을 숙제하듯 소화할 때가 아니라, 뜻밖의 상황을 느닷없이 마주칠 때입니다. 예정에 없었던 대화, 있는 지도 몰랐던 공간, 상상하지 못했던 제품, 경험하기 어려웠던 현상, 기대하지 않았던 디테일 등이 여행의 가치를 높여줍니다. 그래서 여행을 할 때 계획을 세우는 건 중요하지만, 우연이 끼어들 여지를 남겨둘 필요도 있습니다. <생각이 기다리는 여행>은 여행에서 우연이 끼어들 여지가 선물해 준 생각지도 못한 생각들에 대한 기록이자, 계획할 수 없었기에 더 소중한 여행의 조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