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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연한 생각을 만나는 여행

혁신을 거듭했던 기업도 스스로의 역사를 혁신적으로 보여주기는 어려운가 봅니다. 실리콘밸리 여행 콘텐츠를 기획할 때 고객사의 요청으로 인텔 뮤지엄을 방문했는데, 혁신의 기록은 있었지만 기록의 혁신은 없어 아쉬웠습니다. 그렇다고 시간이 아까웠던 것은 아닙니다. 인텔 뮤지엄을 둘러보는 동안 기대하지 않았던 자극과 영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록의 혁신은 없었지만 혁신의 기록 중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5G를 설명하는 코너였습니다. 5G가 더 빠르다는 것을 구슬이 통과하는 속도에 비유해 눈으로 볼 수 있게 전시했습니다. 반복해서 떨어지는 구슬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중학생 자녀와 함께 온 중국인 엄마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5G 쪽이 구슬이 통과해야 할 코스가 더 긴데 왜 더 빠를 수 있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아들이 궁금해하는데 자기는 답을 해줄 수가 없어서 물어본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낯선 이방인에게 서툰 영어로 물어볼 만큼의 용기를 무릅쓰는 부모님의 마음을 모를리 없지만, 저는 답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저 역시도 이유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두 갈래로 구슬이 떨어지는 차이점은 이해할 수 있었는데 여전히 각 구슬이 더 긴 코스를 더 빨리 통과하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설명을 해줄 수 없어 미안하다는 답변에 중국인 모자는 자리를 옮겼지만, 저는 자리를 뜰 수 없었습니다. 나름의 답을 찾고 싶어서가 아니라 근본적인 질문을 놓쳤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5G가 얼마나 더 빠른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5G가 왜 더 빠른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이름 모를 중국인 중학생이 남기고 간 자극을 뒤로한 채 뮤지엄을 서둘러 나오려는데, 출구 쪽에 적혀 있는 인텔 창업자 로버트 노이스의 말에 또한번 발길을 멈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Don’t be encumbered by history.

Go off and do something wonderful.” 

역사에 갇히지 말고 나가서 멋진 일을 하라는 문구는 뮤지엄에 적혀 있기에는 아이러니해 보이지만, 곱씹어보면 기업의 뮤지엄이 가져야할 본질을 표현한 조언이었습니다. 과거의 성과를 바탕으로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지, 과거의 영화에 압도되거나 묻어가는 조직엔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혁신을 주도했던 장본인이 한 말이기에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나가서 멋진 일을 하라는 문구를 따라 뮤지엄을 나서면 기념품 숍이 있습니다. 인텔의 로고가 새겨진 제품들을 판매하는 공간입니다. 컵, 옷 등을 팔고 있어 특별할 것이 없어 보였지만, 한 쪽 벽면에 눈길을 사로잡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Nerd wear’

 

누가봐도 패션 감각 없는 옷들을 ‘너드들을 위한 옷’이라는 컨셉으로 팔고 있었습니다. 감 떨어지는 옷을 포장하는 기술이 눈에 들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너드라고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문화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처럼 패션(Fashion) 대신 열정(Passion)을 택한 사람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환경이 있기에 실리콘밸리가 세상의 변화를 이끌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기록의 혁신을 찾기 어려워 허탕을 친 셈이지만 뮤지엄을 나오는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기술의 조각들을 모아둔 곳에서 보낸 시간 덕분에 생각의 기술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너드임에도 불구하고 너드들을 위한 옷을 장만할 만큼의 용기는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은 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