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bpx

#19. 현대적인 과거 혹은 과거다운 현재

도쿄역을 끼고 있다고 버틸 재간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통과 정보통신이 발달할 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부도심이 부상하니 마루노우치 지역의 경쟁력은 점점 무뎌졌습니다. 도쿄역 앞에 위치한 이점이야 여전했지만, 더이상 그것만으로 승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기 위한 변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재개발을 추진하면서 마루노우치 지역을 일본의 중심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으로 발전시키려는 비전을 세웠습니다.

 

글로벌 비즈니스의 최전선으로 만들기 위해 정부도 전폭적인 지원을 했습니다. 각종 건축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건물이 사용하지 않은 용적률을 다른 건물에 팔 수 있는 권리인 ‘공중권’도 허용했습니다. 용적률에 따라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높이가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데, 최대치까지 사용하지 않은 건물의 남은 높이를 매입해 정해진 용적률보다 더 높게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특히 3층 높이의 도쿄역이 사용하지 않은 용적률이 많았기에 주변 건물들이 공중권을 적극적으로 사들일 수 있었습니다.

 

공중권 덕분에 위풍당당해진 마루노우치 주변의 빌딩들을 보다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건물은 제각각인데, 하나같이 6층 정도의 높이에 해당하는 지점을 자로 잰듯 구분해 두었습니다. 저층부와 고층부 구분없이 빌딩을 짓는 것이 더 효율적일텐데, 어떤 이유에서 건물을 나누어 둔 것일까요?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과거를 보존하기 위함입니다. 일본은 지진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과거에는 건물의 높이를 31m로 제한했습니다. 과거의 건축 기술로는 6층 정도 높이의 건물이어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은 초고층 빌딩도 지을 수 있을 만큼 건축 공법이 발전했지만, 마루노우치 지역을 재개발하면서 과거의 건물들이 가지고 있던 의미와 형태를 직간접적으로 유지하면서 그 위에 고층부를 올린 것입니다.

 

둘째는 휴먼 스케일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휴먼 스케일은 사람의 체격을 기준으로 하는 척도로 사람의 자세, 동작, 감각에 입각한 단위입니다. 사람은 지나치게 거대한 공간에 있으면 불안해하는데 휴먼 스케일로 설계를 하면 그런 감정을 줄일 수 있습니다. 마루노우치 지역은 공중권 거래로 더 거대해진 만큼 사람을 압도하는 곳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층부와 저층부를 구분하고 고층부를 저층부보다 좁은 면적으로 올려, 거리를 걷는 사람이 보기엔 저층부만 인지하도록 설계해 위압감을 줄인 것입니다. 과거를 보존하면서도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까지도 배려하는 지혜가 돋보입니다.

 

휴먼 스케일을 고려한 도쿄역 앞의 건물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물이 있습니다. ‘JP 타워’입니다. 도쿄 중앙 우체국이 있던 자리에 재건축을 하면서 우체국 건물의 외관을 그대로 둔 채로 고층부와 저층부를 이질적으로 지었기에 더 주목도가 높습니다. JP 타워를 더 돋보이게 하는 건, 저층부에 들어선 상업시설 ‘KITTE’ 입니다. 공간의 뼈대 뿐만 아니라 우체국의 역할과 의미까지도 계승하여 KITTE를 구성했습니다. 한 통의 편지가 사람들을 연결하듯이, ‘연결’을 테마로 사람과 사람, 거리와 거리,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는 공간으로 만든 것입니다. 또한 우표를 뜻하는 KITTE라는 이름도 우체국을 연상시킵니다.

 

KITTE 안에 들어서면 기둥 하나 없이 6층까지 뚫려 있는 공간감에 기분이 트입니다. 이 탁트인 공간에 또하나의 현대적인 과거 혹은 과거다운 현재가 숨어 있습니다. 원래 중앙 우체국으로 사용할 당시에는 이 공간에 기둥들이 촘촘히 세워져 있었습니다. 기둥 없이 건물을 지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둥 없이도 건물을 지탱할 수 있어 기둥 대신 공간감으로 건물을 채웠습니다.

 

공간 연출을 위해 기둥을 없앴지만 과거를 지우진 않았습니다. 바닥에 육각형 모양으로 생긴 틀을 만들어 기둥 있던 자리의 흔적을 남겨둔 것입니다. 여기까지야 상상 가능한 방식일 수 있지만 기둥 있던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천장에 철로 만든 선이 과거를 품어내듯 기둥 모양을 따라 장식처럼 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장소성을 보존하며, 컨템포러리적으로 장식적 요소를 표현하는 세련된 방식입니다.

 

시간을 이기는 공간 만큼이나 시간을 이어가는 공간도 매력적입니다. 건물 안밖으로 현대적인 과거 혹은 과거다운 현재가 숨겨져 있는 마루노우치 지역이 인상적인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