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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계의 파타고니아를 꿈꾸다 – 홍콩 이튼 호텔

호텔의 공용 공간이 점점 넓어지고 있는 가운데 홍콩에 끝판왕이 있습니다. 이튼(Eaton) 호텔의 공용 공간은 대형 푸드 코트, 코워킹 스페이스, 갤러리, 공연장, 라디오 방송국, 영화관 등으로 호텔이라는 걸 깜빡할 정도입니다. 덕분에 투숙객은 물론 투숙하지 않는 여행자와 현지인이 한 데 어우러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벌어지는 이벤트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트 위크를 열어 로비에서 행위 예술을 하질 않나, 공중파에서 잘 다루지 않는 주제로 라디오를 녹음하고, 컨퍼런스룸에서는 난민이 큐레이션한 옷으로 패션쇼를 엽니다.

 

사실 이튼은 사회운동가가 만든 호텔입니다. 이튼이 어떻게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가는지, 이를 위해 어떻게 밀레니얼들에게 어필하는지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호텔계의 파타고니아’의 탄생을 기대해볼 만 합니다.

 

 


마천루를 만든 현대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가 설계한 호텔이 있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마지막 작품인 330 노스 와바시입니다. 그가 무려 1920년에 마천루 계획안에서 제안한 커튼 월 공법은 건설 자재가 적게 들어 고층 건물을 빠르게 지을 수 있습니다. 현대 도시의 모습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Jeffery Howe, Bluffton University

 

시카고에는 미스 반 데어 로에가 1969년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설계한 작품이 있습니다. 330 노스 와바시(330 North Wabash) 빌딩입니다. 말년의 작업이니만큼 ‘less is more’라는 그의 건축 철학이 집대성되어 있습니다. 알루미늄 철제와 유리만으로 짓고, 각각 검은색과 진회색으로 입면의 색감을 통일해 단정하고 매끈합니다. 덕분에 뼈대와 창문 간에 에너지가 분산되지 않고 단일한 개체로 인식됩니다. 단순 명료함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40여 년간 IBM 본사로 쓰이던 330 노스 와바시는 홍콩의 부동산 재벌인 로 카 수이(Lo Ka-Shui)를 새 주인을 맞아들입니다. 그는 이 곳을 5성급 호텔 랭햄 시카고(Langham Chicago)로 탈바꿈하기로 합니다. 이로써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최초이자 유일한 호텔이 탄생했습니다.

 

<<< 로비 내부에도 커튼 월 구조를 모티브로 한 디자인을 선보입니다. ⓒ랭햄 시카고

사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마지막 작품이 호텔로 바뀐다는 소식에 건축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재료와 구조로 만드는 모더니즘 건축물에 장식적인 럭셔리 호텔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2013년 새단장을 마친 랭햄 시카고 호텔에는 거장에 대한 존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기존 건축 구조의 취지를 지키며 장점으로 승화하고, 단순 명료한 외피와 어울리도록 최대한 ‘절제’된 럭셔리로 내부를 채웠습니다. 이를테면 300여 개의 객실 모두가 통유리로 전망을 즐길 수 있게 했는데,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일체형 판유리로 된 커튼 월(Curtain wall) 구조의 장점을 잘 살린 결과입니다. 여기에 미스의 손자 더크 로한(Dirk Lohan)도 리노베이션 과함에 참여합니다. 더크는 당시 할아버지를 도와 설계부터 시공까지 마무리했던 장본인으로 미스가 의도한 건축 방향성을 체화하고 있어 정통성이 있습니다. 그의 역할은 기존 건축 기조에 무리한 변형이 없는지 감리하고, 곳곳에 미스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이었습니다. 미스가 딸을 위해 만든 소파와 의자를 복각해 로비에 비치하고, 철과 유리 외에 미스가 애용하던 내장재인 트래버틴(Travertine, 대리석의 한 종류)으로 동굴 같은 이색적인 욕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미스의 손자인 더크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만든 일등 공신이 있습니다. 바로 로 카 수이의 딸인 캐서린 로(Katherine Lo)입니다. 예일대에서 인류학 공부를 마치고 서던 캘리포니아대에서 영화를 만들며 예술과 문화를 탐닉하는 데 여념이 없던 캐서린은 원래 아버지가 하는 럭셔리 호텔 비즈니스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비즈니스 논리의 대척점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 운동가로서의 이력도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해 학교 기숙사에 미국 국기를 거꾸로 게양해 징계를 받고, 한국 농부들이 홍콩에 와서 WTO에 시위를 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만은 달랐습니다. 영화학도인만큼 거장의 마지막 작품이 어떻게 호텔로 재탄생하는지 영상으로 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캐서린은 다큐멘터리 제작 차 리노베이션 내내 함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호텔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캐서린은 몰랐습니다. 이 경험이 패밀리 비즈니스에 한 발 들여놓게 되는 계기가 되리라는 것을요.

 

트로이 목마가 된 호텔

“홍콩에 있는 이튼 호텔을 너가 바꿔볼래? 밀레니얼을 위한 호텔로 말이야.”

 

랭햄 시카고 프로젝트가 끝나고 다시 영화판에 돌아간 캐서린에게 아버지가 또 다른 제안을 합니다. 이번에는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은 거장의 건축물이 아닙니다. 1999년 지은 홍콩의 4성급 비즈니스 호텔, ‘네이선 로드(Nathan Road)에 그 오래된 거(that old thing) 있잖아’라고 하면 모두 아는 이튼 호텔을 다시 여는 일입니다. 에어비앤비나 호스텔이 급부상하는 시대에 랭햄 호텔과 같은 초럭셔리 라인 외에도 대항마가 필요했던 터였습니다.

 

평소 같으면 대번에 거절할 캐서린이지만 ‘밀레니얼을 위한 호텔’이 어쩐지 남다르게 들렸습니다. 밀레니얼이 베이비붐 세대 이후 가장 유망한 소비층이어서가 아닙니다. 캐서린은 밀레니얼이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고 변화에 유연하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닐슨의 조사에 따르면 66%의 밀레니얼들이 지속 가능한 브랜드를 위해 비용을 더 지불할 의사가 있음을 밝힐만큼 밀레니얼들은 보다 의식적이고 윤리적인 소비를 지향합니다. ‘사회적 임팩트’가 구매를 결정할 때 주요한 고려 요소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밀레니얼을 제대로 타깃한다면 어쩌면 캐서린이 바라는 사회적 변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텔을 목표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접근한 것입니다. 패션이나 F&B 업계에서는 파타고니아, 홀푸드 등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선도 기업들이 있는데 호텔업에서는 이런 역할을 해줄 규모 있는 기업이 없습니다. 그래서 캐서린은 ‘호텔계의 파타고니아’를 만들겠다는 포부로 아버지의 제안에 응했습니다. 그렇게 4년에 걸쳐 준비한 밀레니얼을 위한 호텔이 이튼입니다.

 

이튼은 트로이의 목마입니다. 그리스군은 목마 안에 정예부대를 숨겨 트로이 성 안으로 들어가 결국에는 트로이를 함락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튼 역시 겉보기에는 밀레니얼이 열광할 힙스터 호텔로 보이지만 사실 사회적 변화를 목표로 합니다. 밀레니얼들이 호텔을 즐기는 동안 자연스럽게 사회적 이슈에 대한 참여와 생활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목마에 어떤 정예부대를 숨겨두었을지, 이튼이 홍콩 카우룽 시내 한복판에 두고 간 트로이의 목마를 찬찬히 살펴봅시다.

 

4성급 호텔에 대형 푸드 코트가 있는 이유

<<< 왁자지껄한 야시장, 차와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캐주얼한 홍콩식 카페 차찬탱을 연상케 하는 중정형 푸드 코트입니다. ⓒ이튼

이튼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3개 층에 걸쳐 펼쳐진 거대한 푸드 코트입니다. 로비층부터 지하 2층까지 중정을 뚫어놓아 어디에 있어도 푸드 코트 전체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지하 1층에 11개의 다국적 음식점이 입점되어 있고, 지하 2층은 아예 뷔페 아스토(Astor)로 운영해 전 세계 음식을 한 자리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지하 3층에는 광둥 레스토랑 얏퉁힌(Yat Tung Heen)이 있는데 미슐랭 원스타이지만 격식을 차리기보다 캐주얼하고 개방적인 느낌입니다. 북적북적 활기찬 야시장 분위기의 푸드 코트와 결이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요새 호텔들이 식음료 파트를 강화하는 추세지만, 미슐랭 스타를 받은 고급 레스토랑이나 해외 유명 레스토랑의 지점을 유치하는 방식인 것과 구분됩니다. 이튼처럼 마치 쇼핑몰에 온 양 대중적인 푸드 코트로 승부하는 곳은 드뭅니다.

 

<<< 갤러리 투모로우 메이비에서는 컨템포러리 아트를 선보입니다. @이튼

이튼 호텔의 공용 공간은 푸드 코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튼 하우스(Eaton House)라는 코워킹 스페이스, 투모로우 메이비(Tomorrow Maybe)라는 갤러리, 테러블 베이비(Terrible Baby)라는 공연장과 가든 테라스 바, 라디오 방송국, 루프탑 풀을 바라보며 요가할 수 있는 웰니스 룸 등 다양한 용도가 더해진 하이브리드 호텔입니다. 물론 450여 개에 달하는 객실을 보유한 꽤 규모있는 호텔이지만, 객실 외에 투숙객이 아니어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상당히 넓습니다. 호텔이라는 것을 잠시 잊을 정도입니다. 이튼이 이렇게 호텔 아닌 호텔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공연장 테러블 베이비입니다. 언더그라운드 밴드부터 해외 순방 중인 유명 밴드까지 다양한 공연을 펼칩니다.

밀레니얼들의 경험 소비를 극대화하기 위함입니다. ‘물욕 없는 세대’라 불리는 밀레니얼들은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험’하기 위해 소비합니다. 밀레니얼은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첫번째 세대로 합리적 소비를 지향합니다. 예산 빠듯한 이들에겐 값비싼 소유를 하는 것보다 경험치를 넓히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소비 방식입니다. 이를 호텔에 적용해보자면 객실보다 공용 공간에 힘을 주는 것이 방법입니다. 물론 객실에서도 경험 소비를 할 수 있지만, 객실의 퀄리티는 숙박비와 비례하기에 가성비가 떨어지는 ‘소유’에 가깝습니다. 반면 공용 공간은 이를 이용하기 위한 추가 비용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잘 디자인한다면 지갑 얇은 밀레니얼들을 만족시키기에 더 유리합니다.

 

<<< 가장 유동 인구가 많은 푸드 코트 내에 라디오 방송국이 위치해 있어 이튼이 호텔로서는 드물게 미디어 역할도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쉽게 인지할 수 있습니다. ⓒ이튼

그래서 이튼은 숙박 외 여러 기능을 넣어 이 안에서 투숙객, 여행자, 현지인이 한 데 섞이게 만듭니다. 밀레니얼들은 여행할 때 현지인과 같은 경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여기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현지인이 와서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만들면 호텔에서 현지인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현지인들이 편히 오갈 수 있도록 트렌디하되 너무 하이엔드로 가지 않고, 코워킹 스페이스를 두어 상주하는 현지인을 확보합니다. 힙하고 개방적인 로비를 꾸려 지역의 크리에이터들을 끌어모으던 에이스 호텔(Ace Hotel)보다 전선을 더욱 본격적으로 확장한 것입니다.

 

<<< 루프탑 풀을 바라보며 실내 운동을 할 수 있는 웰니스 룸입니다. 요가는 물론이고 태극권, 명상, 기 치료 등 이색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이튼

 

가만 보니 공식 명칭이 ‘이튼 HK(Eaton HK)’이고 법인명이 ‘이튼 워크샵(Eaton Workshop)’입니다. 호텔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습니다. 호텔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고자 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홍콩다움’을 새롭게 창조하다

홍콩은 레트로의 도시입니다. 여전히 트렌드의 최전선을 달리지만 홍콩인과 외국인이 입 모아 리즈로 뽑는 시절은 1980~1990년대입니다. 아시아 최고 국제 도시로서 경제적으로 부흥하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문화적으로 충만했습니다. 온갖 범중화권 문화예술계 인재들이 탄압을 피해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홍콩으로 몰려들어 문화적 토양이 비옥했습니다. 여기에 시한부 이중 국적 도시의 혼란스럽고 암울한 분위기가 더해져 그 시절 특유의 질감을 만들어내던 때입니다. 홍콩인들도 주권 반환 전의 사회 분위기를 그리워하는데다 외국인들도 계속 그 때의 홍콩을 찾으니 레트로가 발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옛 홍콩을 표현하는 방식이 천편일률적입니다. 네온 사인, 붉은색 초롱불, 왕가위의 영화 포스터, 치파오 등 옛 것을 그대로 가져옵니다. 이렇다보니 레트로풍의 공간에 가면 진부하고, 어딘지 가짜 같아 관광 기념품점에 온 듯한 느낌을 지우기 힘듭니다. 오히려 실제 홍콩과는 거리가 있는 쇼윈도 홍콩입니다.

 

반면 이튼이 재해석한 홍콩은 고유합니다. 오브제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에서 실제 볼 수 있는 공간과 사물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를 변형하고 추상화하기 때문입니다. 야시장, 차찬탱 등 오랜 세월을 거쳐 현재까지도 함께하며 대표성이 검증된 것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로써 과거에 멈춘 홍콩이 아니라 이후 세월의 더께까지 더한 홍콩을 담을 수 있습니다. 박제된 문화유적이 아니라 현재의 로컬을 느끼고자 하는 밀레니얼들에게 진짜배기 홍콩을 경험한다는 인상을 아낌없이 줍니다.

 

<<< 홍콩 건설 현장에서는 시설물 관리와 고층 공사를 위해 외벽에 설치하는 임시 가설물을 금속이 아닌 대나무로 만듭니다. 가볍고 변형이 쉬우며 끈으로 쉽게 결합할 수 있고 습한 홍콩의 기후에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푸드 코트의 중정에 매달린 초대형 샹들리에가 대표적입니다. 이튼에 들어서자마자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 이 중앙 장식물에는 3가지의 홍콩다움이 녹아 있습니다. 중국식 초롱불, 홍콩 건설 현장에서 자주 쓰는 가시설물인 대나무 비계, 그리고 시장의 행상입니다. 언뜻 상관없어 보이지만 사실 모두 ‘임시적’이라는 속성을 가집니다. 그래서인지 자칫 압도적일 수 있는 거대한 장식물임에도 캐주얼한 분위기의 푸드 코트와 잘 어우러집니다. 이 셋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 자체가 도전적인데, 소재까지 바꾸었습니다. 종이가 아닌 행상의 텐트 같은 캔버스로 바꾸되 초롱불의 은은하게 비치는 속성을 살리고, 대나무 비계를 형상화하되 대나무가 아닌 철제 파이프로 바꿨습니다. 사후 관리 등 현실적인 이유로 소재를 바꿨지만 본래 속성은 살려 은근하게 레퍼런스와 연결고리를 이어갑니다. 이로써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새로운 홍콩다움을 창조해 냈습니다.

 

<<< 버밀리온 레드 색상으로 칠한 철제 골조가 뉴트로한 홍콩을 잘 보여줍니다. ⓒ이튼

중앙 장식물 뿐 아니라 푸드 코트 자체도 홍콩스럽습니다. 푸드 코트는 야시장 ‘템플 스트리트 마켓(Temple Street Market)’, 카우룽 지역의 유서 깊은 차찬탱(차와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는 홍콩식 카페)인 ‘미도 카페(Mido Cafe)’, 상점의 이중 철창문에서 디자인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일단 야시장 분위기 조성에는 중정 구조가 한 몫 합니다. 야시장의 중앙통로처럼 모든 곳과 연결되는 열린 공간을 만들기 위해 중앙 부분을 뚫어 중정을 두고 그 주변으로 방사형 푸드 코트를 만들었습니다. 원래 연회장으로 쓰이던 막힌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3개층 전체가 소통합니다. 푸드 코트 내 각각의 매장은 철제 골조로 만들어 야시장의 가판대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이 철제 골조 색깔이 오렌지빛이 도는 차분하고 선명한 빨간색 ‘버밀리온 레드(Vermiliion Red)’입니다. 중화권의 전형적인 붉은색이 아니라 염색 컬러로도 애용할 만큼 세련된 버밀리온 레드를 기본 색상으로 선정해 홍콩의 이미지를 스타일리시하게 만듭니다. 주로 허름한 곳에 쓰이던 철제 골조지만 무광의 버밀리온 레드를 덧입혀 대조를 이루니 팝한 느낌마저 듭니다.

<<< 주윤발이 단골이라는 카우룽의 오랜 차찬탱 ‘미도 카페’의 모자이크 타일입니다. ⓒnonameforum

 

이 버밀리온 레드를 중심으로 명도와 채도가 비슷하면서 강한 대조를 이루는 색들을 골고루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 다채로운 색상 팔레트는 모자이크 타일에서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모자이크 타일은 전후에 물자가 부족해 있는 타일을 되는 대로 조각조각 붙이던 것이었는데, 이후 차찬탱이나 작은 상점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홍콩 특유의 인테리어 양식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다양한 패턴과 색상을 조합해 개성을 드러내기에 적합합니다. 이튼에서는 푸드 코트나 화장실에서는 타일을 쓰지만, 객실이나 코워킹 스페이스 등 타일을 쓰기 어색한 곳에서는 모자이크 패턴만 따와 카페트 패턴이나 벽 장식으로 응용합니다.

 

<<< 타일을 부착하기 어려운 곳에는 모자이크 타일의 패턴만 따와 패브릭에 적용하기도 합니다. ⓒ이튼

 

이 외에도 이튼은 다양한 방식으로 홍콩다움을 들여옵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얏퉁힌 레스토랑, 아니타·메기·미쉘 등 시대를 풍미한 홍콩 배우들의 이름을 따 지은 연회장 이름, 호텔 밖 카우룽 지역의 풍경을 내부로 끌어들일 수 있도록 야외 가든 테라스로 지은 바 등 이튼은 그동안 없던 홍콩 종합 선물 세트입니다.

 

<<< 영화 ‘화양연화’에서 모티브를 딴 얏퉁힌은 영화 세트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은근하게 구현합니다. ⓒ이튼

 

개념있는 밀레니얼들이여, 오라

이쯤되면 트로이의 목마가 홍콩 시내 한복판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듯 합니다. 이제 목마 안에 숨어있던 정예부대가 출동할 차례입니다. 정예부대의 정체는 이튼의 존재 이유나 다름 없는 ‘사회적 변화’를 위한 활동들입니다. 인디나 신예 아티스트에게 기회를 주어 문화적 다양성을 넓히고, 성 소수자, 난민, 소수 인종 등 소외받는 계층을 지지하며, 환경 보호를 실천합니다. 이를 호텔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지원합니다. 바로 공간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 로컬 아티스트 아파 안파(Afa Annfa)가 태양 주변을 도는 여자들을 이튼 하우스의 벽면에 그렸습니다. 주체적인 여성을 뜻합니다. 

코워킹 스페이스인 이튼 하우스가 대표적입니다. 이튼 하우스에 입주를 신청하면 ‘어떤 혁신을 만들고 싶으신가요?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등 몇 가지 질문을 받습니다. 대답이 시원찮다고 해서 입주를 막지는 않지만 이튼 하우스의 지향점을 알 수 있습니다. 강제 이주자들의 인권 보호를 위한 단체, 여성의 유리천장을 깨기 위한 멘토 협회 등 예술로든 운동이든 사회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의미있는 곳들을 선호합니다. 필요 시 임대료를 일부 혹은 전액 지원하기도 합니다. 입주사 간 네트워킹과 시너지를 추구하는 코워킹 스페이스의 특성상 점점 비슷한 곳들이 모이게 됩니다. 이로써 단순히 일하는 공간이 아니라 체인지 메이커들의 허브로서 기능합니다.

 

또, 아티스트를 위한 객실인 ‘아티스트 스튜디오 룸’이 있습니다. 침실 외 작업 공간을 별도로 둔 것이 특징입니다. 뮤지션을 위한 객실은 드럼 패드, 마이크, 키보드, 맥 컴퓨터 등 750만 원 상당의 최첨단 오디오 장비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비주얼 아티스트를 위한 객실에는 드로잉과 페인팅을 할 수 있는 넓은 캔버스와 미술 도구를 두었습니다. 아티스트들이 여행하면서도 창작 활동을 지속할 수 있고 심지어 작은 콘서트나 전시회를 즉흥적으로 열 수도 있습니다. 종종 장기 체류용 레지던스로 무상 제공되기도 합니다.

 

 

일하고 작업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 뿐 아니라 대중과의 접점을 제공한다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큽니다. 제대로 된 무대에 서야 적절한 평가를 받을텐데 인디, 신예 아티스트들은 무대 자체를 가지기 쉽지 않습니다. 사회 운동가들의 활동도 메시지가 확산되어야 하는데 아는 사람만 아는 찻잔 속 태풍에 그치기도 합니다. 반면 이튼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객실이 많으며, 다채로운 공용 공간을 갖춘 덕에 유동 인구, 체류 인구가 모두 많습니다. 누가 올 지 몰라 진짜 대중과 의외의 만남이 가능합니다. 이튼은 주체와 주제에 맞춰 갤러리, 공연장, 바, 컨퍼런스룸, 영화관, 라디오 방송국, 웰니스룸 등을 유연하게 활용합니다. 영화관에서 지속 가능한 패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고 감독과의 대화를 가지고, 컨퍼런스 룸에서 소수 인종과 난민들이 큐레이션한 패션쇼를 가지며, 공중파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주제로 라디오를 생방송하기도 합니다.

 

 

 

단순히 외부의 요청이 있을 때만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튼이 직접 이벤트를 주최하기도 합니다. 이튼에는 이를 위한 ‘큐레이터’가 있습니다. 단순히 로비에 어떤 미술작품을 걸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호텔 구석구석을 어떤 콘텐츠로 채워갈 지 기획하는 역할입니다. 이튼 아트 위크, 휴먼/프로그레스 페스티벌, 페미니스트 필름 페스티벌, LP 장터, 로컬 브랜드 바자회 등 이튼의 달력은 쉴 틈이 없습니다. 모두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기 위한 활동들입니다. 사회적 의미를 가지지만 세심한 큐레이팅 덕분에 고루하기보다 힙하고 트렌디합니다.

 

일회성 이벤트뿐 아니라 일상적인 실천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푸드 코트에서는 플라스틱을 쓰지 않고 루프탑에서 채소를 재배해 식당들이 사용하도록 하는 등 로컬 소싱을 장려합니다. 비건 메뉴가 많은 것도 그저 비건이 힙하거나 구색을 갖추기 위함이 아니라 비건이 지향하는 라이프 스타일이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범죄자 인도 반대 시위를 지지하고, 동성애 탄압 반대에 항의해 열렸던 집회인 스톤월 라이엇 50주년을 기리는 등 정치적으로 예민할 수 있는 사안에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이 정도 규모 되는 호텔이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 운동에 큰 힘이 됩니다. 사회적 변화가 단순 CSR 차원이 아니라 존재 이유 그 자체이기에 가능한 행보입니다.

 

임팩트가 있어야 소셜 임팩트를 논할 수 있다

요새 절반 가량 줄기는 했지만 홍콩은 여전히 샥스핀 최대 거래국입니다. 중화권의 진미 샥스핀 요리는 입은 즐겁게 할 지언정 만드는 과정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상어를 잡으면 1kg에 최소 80만 원을 호가하는 지느러미만 도려내고, 질긴 식감으로 인기가 없고 어선의 공간만 차지하는 몸통은 바다에 버립니다. 지느러미가 없어진 상어는 헤엄칠 수가 없어서 고통스럽게 죽어갑니다. 그렇게 죽어간 상어가 연간 72,000마리입니다.

 

이튼 호텔에는 샥스핀이 없습니다. 보통 고급 광둥 레스토랑에는 있기 마련인데 미슐랭 레스토랑 얏퉁힌에도 없고, 결혼식 피로연에도 없습니다. 상어 지느러미를 식재료로 이용한다는 발상 자체를 거부해 인조 샥스핀조차 쓰지 않습니다. 이튼에서 결혼하는 이들은 적어도 하객들에게 샥스핀 금지 캠페인을 실천한 셈입니다. 혼자 샥스핀 요리를 안 먹거나 블로그에 글 하나 올리는 것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이렇게 이튼은 사람들이 사회 변화에 참여하게끔 하며 실질적인 임팩트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홍콩점은 2호점이고, 첫 지점은 홍콩점 오픈 2개월 전에 워싱턴 D.C.에 열었습니다. 이튼이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지척에 있는 트럼프 호텔과 비교되며 ‘안티 트럼프 호텔’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자리잡은 미국과 달리 홍콩은 중국 주권 반환 후 정치적 견해 표현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이튼의 소신이 더욱 반갑고 대단합니다. 앞으로 시애틀과 샌프란시스코에도 지점을 열 계획이며, 샌프란시스코점은 무려 일본의 저명한 건축가 구마 겐고가 설계를 맡는다고 합니다. 비영리 단체나 다른 업계에서는 만들지 못했던 임팩트가 호텔이기에, 그리고 이튼이기에 가능하지 않을까요.

 

참고 문헌

• 이튼 워크샵 공식 홈페이지

이튼 워크샵 공식 인스타그램

이튼 홍콩 공식 인스타그램 / 페이스북

• AvroKo Eaton HK

• EATON HK: THE COUNTERCULTURE HAVEN THAT WANTS TO BE MORE THAN JUST A HOTEL

• 이튼 홍콩 객실 설명

• First look: The gourmet renaissance in newly refurbished Eaton HK

• Daughter’s Artistic Taste At HK Billionaire’s Langham Hotel Chain

• Mediating Mies: Dirk Lohan’s Langham Hotel Lobby at the IBM Building

• 전설적인 건축가, 미스 반 데 로에

• The Langham Chicago